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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로 먼저 접했던 책이었다. 원작이 따로 있다는 것까지는 알았으나 당시에 드라마를 초반에 보다 말아서 흥미가 생기려다 말았다. 읽을만한 전자책을 뒤적거리다가 대여 가능한 책에 미스 함무라비가 있어서 이참에 읽어볼까 대여를 했고, 너무나 술술 읽히는 바람에 거의 3일만에 다 읽어버렸다!
서울중앙지법의 민사 제 44부 좌배석판사 박차오름, 우배석판사 임바른, 그리고 부장판사 한세상. 박차오름이 신입 판사로 44부에 들어오게 되면서 제자를 성추행한 교수,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폭행하다 숨지게 한 남편, 아버지의 재산 상속을 둘러싼 형제자매의 다툼, 주폭 노인 등등 낯설지 않은 주제들의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재판이 일어나는 과정을 들려준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많이 접해 낯설지 않은 변호사나 검사는 뭐하는지 알겠는데, 판사는 무얼하지요?에 대한 답이 되어준다.
책보단 드라마나 영화 같은 영상이 더 쉽게 보기 마련인데, 이 드라마는 당시에 2회정도까지 보고 말아버렸다. 박차오름보다는 임바른에게 많이 공감을 했는데, 1회에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업무를 끝내고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온 임바른이 침대에 누워 핸드폰 알람을 확인하는데 학자금 대출과 관련해서 남은 대출금액?을 알려주는 대충 그런 장면이었다. 소위 엘리트집단인 판사인데 학자금 대출을 열심히 갚아야하는 상황이니 나와 별다를 바 없는 청년이구나 하는 공감? 게다가 초반에 임바른은 남의 일에 귀찮게 나서는 것을 싫어하고,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라 자처한다. 업무에 있어서도 박차오름이 감정적으로 피고인에게 공감할 때도 비교적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하는 편이었다.
자기를 숨기거나 굽히고 살아야하는 여느 직장인을 보는 것만 같아 캐릭터의 성격은 안 친절했을지라도, 캐릭터 자체는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반면에 박차오름은 마치 깨어있는 사람은 이래야해 라고 나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달까. 왜 사람이 너무 순진무구하고 착하면 조금 부담스러운 기분이 들때가 있지 않은가. 내겐 박차오름이란 캐릭터가 딱 그랬다. 게다가 초반엔 '미스 함무라비'라는 별명이 붙게 한 에피소드 때문에(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출근해서 한세상 부장이 꾸짖자 온 몸을 감싸는 히잡을 두르고 나와 한세상 부장 뒷목 잡게 만든 일) 너무나 용감하지만 그만큼 조직문화를 정면으로 받아치는 느낌에 개인적으로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박차오름이라는 인물 하나만 놓고 볼게 아니라 드라마 전체 인물들과 사건들에 좀 더 중심을 두고 봤으면 드라마를 재밌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캐릭터에 집중을 못하니 드라마를 결국 보는둥 마는 둥. 그렇게 잊고 살다가 원작 책을 만났는데, 더없이 깔끔하고 술술 읽혀서 신기했다. 현직 판사이기도 한 작가가 실제 자신의 직업군에 있는 일을 써서 그런지, 혹은 읽고 있는 내가 그런 생각을 계속 머리 속에 두고 읽어서 그런지 소설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실제이야기인것만 같은 느낌도 들었다. 박차오름, 임바른, 한세상이 대신해서 작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기분.
특히 좋았던 점은 주요 인물들의 성격이 모두 만만치 않으나, 인물의 성격보다는 사건을 중심으로 글이 서술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책의 말미에 이 세사람의 관계에 대한 깜짝 반전을 가미해서 소설다운 마무리였으나, 에피소드 자체는 충분히 그럴싸한 상황이고, 2년전 책이나 현재에도 도처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갖고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설의 초반에는 박차오름, 임바른 각각이 판결을 내리면서 개인이 부딪히는 생각의 차이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 같은 것이 그려졌다면, 소설이 끝나면서 마지막 에피소드였던 국민참여재판을 통해서는 판사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람들에게까지 그 범위가 넓혀졌다. 재판에서 다루어지는 여러 사건들에 대해서 판결을 내린다는 것은 단순히 옳고그름만을 가리는 간단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옳고그름보다는 누가 더 논리적인가, 누가 더 자신의 주장을 적절하게 설득력있게 증명할 수 있는가에 차이가 아닐까. 그리고 사람은 그리 쉽게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종족이 아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 그와 맞지 않는 결과를 마주하게 되면 당연히 그것을 부정하려 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박차오름과 임바른이 서서히 성장하는 것을 보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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