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목표 12권의 책읽기 중 세번째 읽기. 찬호께이의 신작 '망내인'
바로 전에 읽었던 13.67이 꽤 재미있어서 작가에 대해 찾아보다보니 비교적 신작이었던 이 작품을 발견했고,
도서관에 예약 걸어놨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서 순번이 돌아왔다.
첫인상은, 책이 꽤 두껍다.
육중한 몸을 자랑하는 이 책은 700페이지에 다다른다. 처음 며칠은 시간이 잘안나서 몇장 못 펼쳐봤다가 요며칠 마음잡고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계속 책을 놓지 못하는 그 기분. 오랜만에 느껴봤다. 덕분에 새벽 3시까지 책을 붙잡고 있었다.
열다섯 살 소녀 샤오원이 온라인상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22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소녀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언니 아이는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에 이어 동생마저도 잃은 슬픔에 탐정사무소의 도움을 받아 동생을 괴롭힌 사람들을 찾으려한다. 그러다 만난 아녜라는 이름의 해커는 이름 이외에는 아는 것이 하나 없지만 괴팍하고 무례하지만 그의 도움을 받아 동생의 죽음의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유명 인터넷 게시판에 악의적이고 거짓된 글을 퍼뜨린 사람들을 찾아내면서 아이는 동생에게 무심했던 자신과 몰랐던 동생의 모습을 알게된다.
추적의 끝에서 진실을 마주한 아이와 아녜는 법으로는 벌할 수 없는 용의자들을 직접 벌하기 위해 복수를 계획하고, 아녜의 치밀한 계획대로 복수가 진행된다. 그러나 복수의 마지막 순간, 아이는 샤오원의 진심과 스스로의 모습을 똑바로 마주하게 된다.
두가지 이야기가 존재한다. 하나는 아이가 동생 샤오원을 죽인 범인을 찾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찾아낸 범인에게 복수하는 이야기. 절반을 달려 범인을 찾아낸 순간에서 나는 책을 덮지 못하고 아이와 아녜가 어떻게 복수하는지를 계속 지켜보게 되었다. 망내인의 이야기는 그리 먼 곳의 이질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배경이 홍콩이라는 점이 다를 뿐, 능히 한국사회에서, 아니 한국뿐 아니라 현대 사회 어느곳에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나의 '신상'이 공개되어 사실따위에 관심없는 자들은 인터넷에 올라온 극히 단편적인 글 몇 줄에 선동되어(혹은 선동하여) 이른바 마녀사냥을 당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주위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사실은 그런게 아닌데... 해명하려고 해도 듣는 사람은 없다. 익명의 뒤에 숨은 자들에게 진실이란 자극적이고 본인들에게 순간의 즐거움을 주면 그만인 것이기 때문.
어떤 하나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어느정도의 노력을 퍼부어야만 그 사람을 이해한다거나 혹은 그 사람이 겪은 사건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에는 그런게 없다. 아니, 인터넷상 대부분의 누리꾼들은 그만한 '노력'을 붓지 않는다. 출퇴근길에 읽어본 글 몇 줄, 공부하다가 혹은 일하다가 잠깐쉬는 시간에 읽어본 댓글 몇 줄로 이해하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정보를 단시간내에 접하게 된 사람들은 좀 더 시간을 들여 깊이있게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덜하게 되었다.
그렇게 현대 인터넷 사회의 여론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볍게 만들어졌으나 소문의 당사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
나 자신조차도 인터넷 기사의 누군가를, 게시판의 누군가가 겪은 일들을 가볍게 여기고 넘어가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진실은 그게 아닌데 사실 진실이란 것에 관심도 없다.
SNS란 또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우린 그 무서움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다. 정말 마음은 나를 보여주고 싶고, 뽐내고 싶고, 익명의 어딘가 나와 공감해주는 사람을 싶고. 퍼거슨이 말했지.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라고.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면서도 각종 SNS를 끊지못하고, 그곳에 자꾸만 나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 나조차도. 굳이 해커까지 갈 필요도 없다. 스마트폰을 조작할 수 있는 누구라도, 한 사람에 대해 알아내는 것이 마냥 어렵지만은 않은 사회가 되었다.
책을 읽어내려가는 속도에 동력을 더해주는 건 책의 이야기가 얼마나 나와 비슷한가일테지. 샤오원이 겪은 일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이야기일 수도, 내 친구의 이야기일 수도, 내 가족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망내인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착하게 살고 싶어도, 착하게 살아도, 내 뜻대로 되지만은 않은 세상이 바로 인터넷 속 우리의 모습일까.
'감상문 > 책상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평] 운명과 분노 (Fates and Furies, 2015) (0) | 2020.05.30 |
---|---|
[서평] 노란 불빛의 서점 (The Yellow-Lighted Bookshop, 2009) (0) | 2020.04.26 |
대니쉬걸(The Danish Girl, 2011) (0) | 2019.01.02 |
미스 함무라비(문유석, 2016) (0) | 2018.10.16 |
13.67 (찬호께이, 2015) (0) | 2018.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