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방구석 미술관
저자 조원재
출판 블랙피쉬
발간 2018.08.03
- 이 책의 좋은 점은 봐도 봐도 헷갈리는 19~20세기 서양 미술가(프리다 칼로가 있어서 이 표현은 정확하지는 않다)들의 작품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 모네, 마네, 세잔 등등 이름은 들어봤는데 작품은 늘 헷갈리는 그들말이다. 인상주의니 후기인상주의니, 야수파니 어쩌니 하는 것들까지도 예외는 아니다.
- 작품은 그 작품을 그린 화가를 드러내는 창이다. 그이의 히스토리 없이 그 작품만 떼놓고서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작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작품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건 당연하다. 이 당연한 흐름을 읽기 쉽게 드러내었다는 것이 <방구석 미술관>이라는 책의 큰 장점이다. 술술 읽힌다. 술술 읽힌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글쓴이의 큰 능력을 요하는 것이다.
1) 에드바르트 뭉크(1863.12.12. ~ 1944.1.23.)
- 자신의 삶을 둘러싼 죽음, 가혹한 삶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을 그림 위에 쏟아내기로 한 자. 선천적으로 류머티즘을 앓아 평생 관절염과 열병에 시달렸고,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 열네 살이 되던 해는 한 살위의 누나 소피에도 사망하면서 죽음은 늘 그와 함께 있는 듯 했다. <병든 아이>
- 그의 생기를 갉아먹고, 죽음의 위험까지도 놓이게 했던 그의 사랑은 작품의 영감을 주었다. <마돈나>, <마라의 죽음>
- 오직 자신의 삶에서 나오는 경험과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에만 집중했던 그는 자신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 사랑의 고통, 존재의 허무함 등의 감정을 회화에 표현했다. 그의 '표현주의' 작품은 독일 표현주의 시발점이 된다. 독일 표현주의는 칸딘스키에게 영향을 주며 추상회화로 이어진다.
2) 프리다 칼로(1907.7.6. ~ 1954.7.13.)
- 여섯 살에 앓은 소아마비로 성장이 멈춘 오른발은 그녀를 평생 괴롭히고, 이내 죽기 얼마 전에는 절단하기까지 한다. 열여덟살에 당한 버스와 경전철 충돌 사고로 그녀는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골반뼈가 세 동강이 나며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된다. 불임의 몸 역시 평생 그녀에게 큰 고통을 준다.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
- 그녀는 사고로 인해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그림을 그림으로써 벗어나려하고, 이때 당시 멕시코의 국민 화가 디에고 리베라는 만난다. 그녀의 인생에 정말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 <무기고(디에고 리베라)>,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 그러나 22살이나 차이가 났던 두 사람의 결혼은 순탄치 않았다. 이미 두 번의 결혼과 네 명의 자식이 있는 디에고 리베라는 결혼 후에도 바람을 피웠고, 무엇보다도 아이를 가지고 싶었던 프리다는 2번의 유산을 겪으며 크게 슬퍼한다. <떠 있는 침대>, <단지 몇 번 찔렸을 뿐>
-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두 명의 프리다>
3) 에드가 드가(1834.7.19. ~ 1917.9.27.)
- 독신남이었던 드가는 평생을 '여성'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세탁부 일을 하는 여성,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 이로 밧줄을 앙 물고 공중으로 올라가는 서커스 여성, 모자를 파는 여인, 머리를 빗는 여인, 심지어 매춘부까지. 그는 그리스신화의 여신이나 귀족 여인이 아닌 파리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인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 화려한 무대 위의 삶 뒷편에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버텨야했던 발레리나를 그린 무수한 그림들은 따뜻하고 고결하기도 하다. 소녀들의 고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과도 같았다. 부르주아 남성들에 의해 상처받는 하류층 여성들의 애환을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이다. <무대 위의 리허설>
4) 빈센트 반 고흐(1853.3.30. ~ 1890.7.29.)
- 1800년대 파리를 주름잡았던 술, 압생트. 고흐 역시 압생트에 몰두했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만신창이가 된다. 그는 태양이 이글거리는 남프랑스 아를에서 주로 야외에서 작업하며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온통 강렬한 노란색이 담긴 작품들을. 당시 압생트에 있던 산토닌은 과다복용시 온통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을 유발할 수 있었고, 고흐 역시 황시증에 걸려 온 세상을 노랗게 보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의 세상은 노란색이었고 그는 본 것을 작품에 표현한 것일지도.
- 산토닌 이외에도 포함되었던 튜존은 뇌 세포를 파괴하고 정신착란과 간질 발작을 일으킨다. 고흐는 끝내 압생트의 부작용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스스로 귀를 자르고 만다. 심지어 잘린 자신의 귀를 손수건에 싸 매음굴 여인에게 가져다준 후 별일 없는 듯 잠을 잤다고 한다.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
- 이 사건 후 중독 증세를 치유하기 위해 제 발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그림에만 몰두하며 사투를 벌인다. <별이 빛나는 밤>과 <붓꽃>이 이때 탄생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압생트의 저주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자신에게 권총을 쏘아 죽게된다.
5) 구스타프 클림트(1862.7.14. ~1918.2.6.)
- 1890년대부터 '새로운 예술을 하자'는 아르누보(Art Nouveau) 운동이 펼쳐졌다. 그 열기를 이어받아 독일에서도 '젋은 예술을 하자'는 유겐트스틸(Jugendstil)운동이 확산된다. 유럽 전역에서 젊은 예술가들이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을 하자고 외치고 있었고, 보수적인 빈에서 활동하던 클림트는 이에 동참하기로 한다.
- 1897년, 클림트는 빈 미술가협회에서 완전히 분리된 새로운 미술그룹, '분리주의(Secession)'그룹을 만든다. 기존 권력자의 검열이나 취향에서 벗어나 예술가가 보고 느끼는 진실을 자유롭게 표현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사회를 더욱 자류옵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도 불태운다.
- 새로운 시대, 새로운 예술! 자신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그는 가짜가 아닌 '진짜'를 그렸다. 사회적 금기나 규율에 갇히지 않고 인간 내면의 진실을 예술로 밝히겠다는 클림트의 <누다 베리타스>, <키스>, <다나에>, <유디트>와 같은 걸작은 기존 권력자들에 대한 투쟁의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6) 에곤 실레(1890.6.12. ~ 1918.10.31.)
- 에곤 실레에게 '성(性)'은 그의 작품을 아우르는 근간이다. 그림에 대한 타고난 재능과 열정이 탁월했던 어린 실레는 아버지 아돌프 실레를 무척 좋아하고 따랐지만 그는 성병인 매독을 앓고 있었다. 이것은 실레의 어머니 마리에게까지 감염되어 아이가 사산되고, 실레가 세 살 때에는 열 살이던 누나마저 선천성 매독으로 사망한다. 매독 증세가 심해진 아버지는 직장을 잃고, 발작을 일으키던 중 투자했던 주식과 채권을 모두 태워버리기까지 한다. 열 다섯 살 실레는 아버지의 사망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고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단 이유로 어머니를 평해 증오했다.
- 그의 작품은 죽음을 부르는 '성(性)'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과 어린 나이에 성에 대하 트라우마에서 출발한다. 클림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그는 자기만의 예술을 실험하고자 하였으며, 반 고흐와 뭉크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캔버스 위에 쏟아내는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끝내 그는 자기 마음대로 그리겠다는 다짐으로 스스로를 치유한다.
- 자연이 자신에게 준 것을 삶에서 즐기기 위해 스스로를 믿고, 용기를 내, 위험을 기꺼이 껴안으며 투쟁하는 것. 이것이 에곤 실레의 작품이다. 그는 자신의 겉모습이 아닌, 자신의 '속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사지가 잘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고통받아 몸부림 치고 있는 자신의 속 모습을.
7) 폴 고갱(1848.6.7. ~ 1903.5.8.)
- 어린 시절 페루에서의 삶, 망망대해를 다니던 선원의 삶은 그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다. 증권맨이었던 고갱은 주말이면 파리 근교로 나가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취미생활은 어느샌가 필사의 노력을 쏟아붓는 것이 된다. 10여 년간 이중생활을 하던 그는 남들보다는 조금 늦은 서를 셋부터 전업화가의 삶을 살게 된다.
- 녹록하지 않았던 전업화가의 삶이었지만, 고갱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묵묵히 나아간다. 유행을 쫓지 않고 오직 그만의 예술을 하며. 그는 '고갱만의 예술 세계 발견', 자신만의 개성이 넘치는 유일무이한 세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이것이 고갱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예술의 영역을 간절히 만들고 싶어했다.
- 페루에서의 어린시절은 고갱의 작품 주제를 결정하였고 '원시와 야생'을 자기 예술의 근원으로 삼는다. 또한 실재와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색을 쓰기 시작한 고갱은 자신이 느낀 바를 틀에 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색채로 자유롭게 표현했다. 누구도 의심치 않았던 고정관념을 고갱이 깨부쉈는데 이러한 발상은 20세기 초 야수파 탄생의 핵심 요소가 된다. <모자를 쓴 여인>
- 단 한 번 명멸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할 것인가? 그 행위 속에 '진짜 나'가 있는가? 그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진짜 나'를 발견하고 완성하는 것인가. 그는 자신의 삶과 작품으로 이런 물음을 끊임없이 던졌던 것일까. <우리는 어디어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8) 에두아르 마네(1832.1.23. ~ 1883.4.30.)
-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는 정통 귀족 출신으로 전통 미술 교육을 받아왔던 마네에게 화가 인생을 바꿀 전환점을 주었다. '현대의 생활, 즉 동시대 사람들과 생활상을 그려라.' 보들레르의 생각을 마네는 미술에 고스란히 담는다. 평평한 종이에 평평하게 그리는 우키요에 역시 보들레르가 말하던 생각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 마네의 유명한 작품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평범한 옆집 사람들이 퇴폐적으로 놀아나는 것을 그리고 있었다. 시대의 거울이 되는 그림을 그려 당시 방탕한 남성들의 일상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마네로 인해 미술은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 비로소 시대와 함께 호흡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가 '미래로 가는 문'을 마련하였다.
- 희대의 문제작 <올랭피아>는 타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명작을 오마주하였으나, 매춘부를 그려냄으로써 또다시 부르주아 남성들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고, 특히 원근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엄청난 작품이었다. '그림이 그려지는 곳은 평면이다'라는 마네의 발상 전환은 이후 인상주의, 입체주의, 추상주의 등 모든 모더니즘 회화의 기본 정신으로 이어진다.
- 사망하기 1년 전 완성한 작품 <폴리베르제르 바>에서 마네는 한 장의 그림에 단일시점이 아닌 복수시점을 적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발상은 세잔을 거쳐 피카소에 이르는 입체주의로 이어진다.
9) 클로드 모네(1840.11.14. ~ 1926.12.5.)
- 19세기에 새로운 시대정신이 탄생한다. '답은 오직 하나'라는 획일적 사고에서 벗어나 '답은 사람 수만큼 다양할 수 있다'는 다원적 사고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천천히 자리 잡기 시작한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시대로 나아가는 것이다. 특히 미술이 재빨리 근대의 옷을 입게 된 데에는 카메라의 등장이 매우 강력하게 영향을 끼쳤다.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카메라보다 완벽하고 사실적으로 인물과 풍경을 묘사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모네는 평생 '자연'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다. 바르비종파 화가들과 어울렸던 모네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경화의 매력에 푹 빠진다. 그리고 고 용킨트와의 만남을 통해 '주관적 감성을 담은 풍경화'를 알게 된다. <루엘 풍경>, <운하 위 달빛(요한 바르톨트 용킨트)>
- 마네는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려는 젋은 화가들의 리더로 추앙받고, 야심 있는 젋은 예술가들이 바티뇰 거리에 있는 마네의 집으로 찾아갔다. 모네 역시 그들 중 한명이었으며, 마네의 우키요에는 모네에게도 캔서브는 평평하며, 원근법을 버리고 단순함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전수받게 된다. <생타드레스의 테라스>
- 카메라의 원리를 파고 들며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비치는 '빛'을 보고 있으며 사물이 지닌 고유의 색은 없고 사물의 색은 '빛'에 의해 변하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사물의 형은 '빛'에 의해 변하는 것이다. 이로써 모네는 자연을 '빛의 반사로 탄생한 무수한 색채 조각의 총합'으로 보기 시작한다. <인상, 해돋이> <건초더미 연작>
- "대다수가 반대하고 멸시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믿는 바를 당당하고 일관되게 추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끝 모를 고통과 고독의 시간을 온전히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모네의 삶은 스스로 거친 바다에 배를 띄우고, 아무도 믿지 않는 미지의 신대륙을 찾아 떠난 어느 선장의 항해일지를 보는 것 같습니다."
10) 폴 세잔(1839.1.19 ~ 1906.10.22.)
- 모네 이후 인상주의가 크게 유행하며 너도 나도 똑같은 인상주의 그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인상주의 매너리즘에 빠진 파리 미술계에 전혀 새로운 미술을 하겠다는 화가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고갱, 반 고흐, 툴루즈 로트레크 그리고 세잔이다. 이들을 후기인상주의자라고 부른다.
- 미술을 독학하며 대가의 그림을 교본 삼아 연습하기를 10년, 20대의 세잔의 그림은 명확한 스타일이 없었다. 그러나 카미유 피사로라는 스승을 통해 세잔은 인상주의에 눈을 뜨게 된다. 자연과 빛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 그림을 그리는 테크닉은 부족했지만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었던 세잔은 회화는 머리로 만든 논리적 '개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젊은 화가들이 인상주의의 표면에 드러난 짧은 붗 터치를 맹목적으로 좇고 있을 때, 세잔은 짧은 붓 터치가 나온 근원을 자신의 회화에 적용하였다. <에스타크의 바다>
- 세잔이 추구했던 것: '자연의 본질'과 '조화와 균형'. 자연의 본질을 통찰해 그리겠다는 목표와 함께 캔버스 안에 100퍼센트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그림 속 사물 간에 화음'을 구성하였던 것이다. <대 수욕도>
11) 바실리 칸딘스키(1866.12.16. ~ 1944.12.13) / 가브리엘레 뮌터(1877.2.19. ~ 1962.5.19.)
-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음악과 미술을 무척 사랑했던 칸딘스키는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을 운명적으로 마주하며 예술의 중심지 뮌헨으로 가 미술을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의 삶에 중요한 존재였던 가브리엘레 뮌터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전통을 계승하기도, 진보 예술가들의 분리파도 받아들이기 싫었던 칸딘스키는 독자적인 길을 가며 팔랑크스 미술학교를 세운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학생을 받았기 때문에 가브리엘레 뮌터가 입학하여 미술을 배울 수 있었다.
- 스승과 제자에서 연인이 된 두 사람은 유럽여행을 하며 사랑을 불태우고 뮌헨 남부의 시골 마을 무르나우에 정착하며 예술과 미술을 점점 가꾸어 나간다. 칸딘스키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구상회화가 아닌 '마음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추상회화를 그렸다. 정체불명의 그러나 순수한 형태의 색만으로 회화를 그려낸다. 그의 캔버스 위에는 '점, 선, 면 그리고 색'이 자유롭게 연주를 하는 듯 하였다.
- 칸딘스키는 무르나우에서 뮌터, 프란츠 마르크, 아우그스트 마케, 알프레드 쿠빈 등과 하몎 1911년 12월 청기사 그룹을 만든다. "새로운 표현방식을 찾는 무한도전. 만약 그것을 찾았다면 또 다시 새로운 표현방식 찾기를 무한 반복." 이것이 청기사들의 예술을 대하는 태도였다.
- 칸딘스키와 뮌터는 일방적으로 마음이 식어버린 칸딘스키로 인해 이별하게 되고, 1957년 거장이었던 80세의 뮌터가 소장하고 있던 100여 점의 청기사파 작품을 모두 기증한다. 전쟁 동안 퇴폐미술로 간주되었던 청기사파 작품을 그녀가 몰래 지켜오고 있었던 것이다. <새들의 아침식사(가브리엘레 뮌터)>
** 책 속에 저자의 문장들을 참고하여 후기를 끄적여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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