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2022.11.09 (한국)
국가 미국
장르 액션
러닝타임 161분
감독 라이언 쿠글러
출연 레티티아 라이트(슈리/블랙 팬서), 앤젤라 배싯(라몬다), 다나이 구리아(오코예), 루피타 뇽(나키아), 테노치 우에르타 메히아(네이머), 마틴 프리먼(로스), 윈스턴 듀크(음바쿠)
| 줄거리
원일 모를 병으로 트찰라가 죽은 이후, 수많은 강대국들이 비브라늄을 뺏기 위해 와칸다를 위협한다. 아들의 죽음으로 다시 여왕이 된 라몬다는 와카다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슈리 역시 오빠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연구에 매진한다. 한편, 와칸다 밖의 비브라늄을 찾던 CIA는 대서양 한가운데의 바다 속 깊은 곳에서 드디어 비브라늄을 찾지만 깊은 해저에서 모습을 드러낸 네이머와 탈로칸 전사들에 의해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다. 이 모든 싸움의 원인을 와칸다로 돌리는 가운데, 탈로칸과 와칸다는 서로 싸우게 되는데...
| 후기
한 줄 요약: 어떻게 단 한 줄로 이 마음을 적어낼 수 있을까. 영화 전체가 처절하게 목놓아 블랙 팬서를 그리워한다.
스케줄이 안되어서 개봉 시기에 보지 못하고 열흘이나 넘겨서 보게 되었다. 어떻게든 스포는 피하려고 블랙 팬서의 ㅂ자만 나와도 어플을 닫아버리는 지경이었지만, 단 하나 피하지 못한 평론이 있었으니 무려 이동진 평론가의 후기였다.
'3년이 넘도록 하염없이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마블'
영향력 있는 평론가이니만큼, 그의 한 줄 후기를 읽으니 내심 열정이 푸시식 식어버리는 마음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극장에서 꼭 봐야겠다는 의지 하나로 겨우 시간을 내어 보고 나온 지금은 이 후기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블이 3년이 넘도록 작별인사를 하고 있는 건 맞지만,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한 적은 있던가? 전작의 영웅들을 순식간에 흩날려버리고, 전작의 참신함을 조금씩 잃어버리는 작품들을 계속 올리고 있는 마당에, 이번 블랙 팬서는 단순히 마블이 앤드게임으로 친 사고를 수습하는 수준이 아니라, 진심으로, 온 정성을 다하여, 다시는 나오지 않을 진정한 단 한 사람에 대한 충분한 애도를 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시껄렁한 마블의 사고 수습의 하나로 퉁쳐버리다니. 대단히 실망스러운 마음에 다시는 그의 평론을 보지 않으리라 결심까지 할 지경이다. 역시 까도 보고 까야 한다. 남의 후기를 빌려 까지 말자.
이미 오프닝부터 온 마음으로 채드윅을 그리워 하고 있다. 단 한명을 위한 MCU 오프닝. 채드윅이 나왔던 장면들이 흘러나오며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쓸쓸한 감정이 더해지는 것 같아 괜시리 울적해지기도 했지만, 영화에서 라몬다가 말한 것처럼 마치 온 바람 속에 그가 깃들어 있어 이 영화를 함께 보고 있기라도 한 듯하다.
앤드 게임 이후의 마블 영화는 끊임 없이 '상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완전한 세계의(허구헌날 외계에서 악당들이 쳐들어와서 된통 당하고 당한대로 복수해주는) 중심축이 되던 히어로들이 사라지고 어벤져스라는 관계가 느슨해지면서, 캐릭터들은 그들 각자가 처해진 상황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더 이상 앤드 게임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그러니까 이건 마블이 친 사고가 맞다). 그런 와중에 실망스러운 작품이 나오기도 하고(러브 앤 썬더라던가..), 다 됐고 그냥 수고했다고 응원해주고 싶은 작품도 나오고(집을 잃어버린 애기거미라던가), 멀티버스라는 주제에 잡아먹혀버린 작품이 나오기도 하지만(여러 방법으로 개고생하는 닥터의 이야기는 그나마 재밌어서 2번이나 봤다), 이렇게 온 마음으로 상실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히고 이야기하는 것은 블랙 팬서가 유일하지 않을까. 심지어 단순히 영화 속 캐릭터가 출연계약을 종료시킨 것이 아니라, 아예 더이상 우리의 삶에서는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가 연기했던 캐릭터는 전무후무한, 백인도 아닐뿐더러 미국인도 아니지만(이게 더 중요하다),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정의롭고 약자를 지키는 강인한 흑인의 후손이자 지도자였다. 감히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지만 약탈당한 민족의 후예였으나 고결하고 정의로우며 강인했단 말이다. 다시는 나오지 않을 캐릭터이고, 그 캐릭터를 사랑한 마음들도 이제 모이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이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역시 다시는 나오지 않을 훌륭한 배우인데. 이 모든 서사를 다 함께 지켜봤으면서도 왜...
죽은 건 아이언맨뿐만이 아니다. 나타샤를 위한 애도는 과거의 이야기를 다룬 그녀의 솔로무비 한 편이었고, 캡틴 아메리카는 잃어버린 사랑이라도 되찾았지. 뿔뿔이 흩어진 옛 영광의 히어로들은 이제 후계자들에게 천천히 그 자리를 내주고 있는데, 세계관이 너무 커져서 후계자들이란게 이제는 누가 누군지 종잡을 수가 없다. 죽은 건 아이언맨뿐만이 아닌데, 다른 퇴장한 이들마저 정신없는 세계관에 휩쓸려 그 영광의 빛이 바래지고 있다. 그런 와중인데 왜 깊은 상실을 경험한 캐릭터들이 내내 자기 아픈 얘기를 좀 한다고 그게 지루하다는 평을 들을 일인지. 개인적으로 이 '상실'에 대해 정면으로 들이 박은 것이 유일하게 '완다비전'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드라마는 완다비전, 영화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라고 해야겠다.
후기에 대한 실망은 접고, 내용에 집중하며 몇 자 더 끄적여본다. 영화가 끝난 후 내 머리 속에 강렬하게 남은 것은 역시 라몬다 여왕의 울부짖음이었다.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은데다가 하나 남은 딸마저 생사를 알 수 없는 지경에, 세계 초강국의 여왕으로서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그녀가 더 이상 내가 무엇을 바쳐야 하냐고 울부짖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찔끔 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가족도 아닌, 힘없는 한 아프리카계 소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다. 이 얼마나 고결한 캐릭터인가. 오빠를 잃은 상처가 채 치유되기도 전에 엄마를 잃어버린 슈리라니. 슈리에게 너무 잔인한 스토리 아닌가.
슈리는 내내 오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머리로는 받아들였지만 마음으로는 놓지 못했달까. 바람 속에 티찰라가 느껴진다는 어머니의 말도 어린 슈리는 공감할 수 없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복수로 블랙 팬서가 되기로 했을 때, 그녀의 꿈에 나타난 것은 오빠도, 엄마도 아닌 바로 킬몽거였다. 전통이고, 관용이고 뭐고 그저 활활 불타오르는 복수심 하나만으로 블랙 팬서가 되고자 했던 그녀가 가장 바라던 모습이 킬몽거라니,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영웅이 언제나 정의로울 필요는 없고 좀 인간적이어도 된다고 글로야 쓸 수 있지만 이렇게 대놓고 보여주니 할 말을 잃을 지경. 그렇지만 활활 불타오르던 복수심을 결국 붙잡은 것은 그녀의 오빠와 엄마가 지키고자 했던 와칸다에 대한 애정이었으리라. 끝내 개인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진정한 블랙 팬서가 된 슈리가 참으로 대견스럽고, 부제의 의미는 가족을 모두 잃으면서까지도 가장 지켜야하는 그들의 숭고한 의무 아니었을까.
슈리의 험난한 여정을 따라가며 겨우 마지막에서야 그녀는 오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아니, 겨우 제대로 작별인사를 한 느낌이다. 그동안 트찰라와 슈리가 함께 했던 장면들이 떠오르며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밝고 명랑한 슈리와 너무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의 슈리가 대비된다. 그리고 다시는 커다란 화면에서 볼 수 없을 티찰라까지. 마블은 다시는 이런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없다. 설령 비슷한 캐릭터가 나오더라도 다시는 그만큼 사랑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늘 상실에 대해 말하며서도 마지막에는 가느다란 '희망'을 던져놓기도 한다. 쿠키 영상은 1편뿐인데, 그 1편에 희망이 숨어있다. 내가 또 쿠키에서 폭풍 눈물을 흘렸다. 꼭 봐야한다. 스포하기 싫다.
와칸다는 블랙 팬서가 수호자이지만, 강인한 여성들이 지켜왔다 . 티찰라의 주변에는 언제나 든든한 도라 밀라제가 있었고, 오코예가 있었고, 나키아가 있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티찰라가 지켜야하는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트칠라를 지켜준 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죽은 후에 남겨진 이들이 누군지는 당연한 거 아닌가.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당연히 누구의 이야기를 해야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다. 새로운 트찰라를 섭외하지 않고, 단 한편으로, 영화 내내 온 마음으로 그를 애도하기로 한 마블의 결정이 정말 오랜만에 마음에 든다. 사실은 2시간 40분도 모자른 것 같다. 우리는 더 오랫동안 그를 기억하고 그리워해도 된다. 트위터에서 봤던 어떤 글이 떠오른다. 영원한 것은 없는데, 왜 죽으면 영원히 볼 수 없을까.
그리고 꼭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거대한 두 세계가 대립한다고 홍보문구를 그럴싸하게 쓰긴 했지만 나는 좀 거부감이 든다. 거대한 두 세계라니. 이 이야기는 몇백년 동안 약탈당한 끝에 더이상은 잃지 않으려고 버텨낸 두 세계가, 또 남의 것을 탐내려하는 괘씸한 이들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갈등과 싸움을 한 이야기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후손들과 멕시코계 토착인의 후손들이 왜 남의 것을 탐내는 서양놈의 후손들 때문에 서로 피를 보아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걸 왜 거대한 두 세계라는 등 그럴싸하게 포장하냐. 결국 약탈을 일삼던 이들 때문에 약탈당했던 이들은 자기들끼리 피를 봤다. 3편이 나온다면 여전히 정신 못차리고 남의 것을 탐내려하는 양키랑 좀 각잡고 싸워줬으면 싶다(그런데 속편이 아이언하트랜다). 그냥 대륙을 다 부숴서라도 와칸다가 다 밀어버려라.
2012년에 어벤져스가 개봉했다. 2018년은 앤드게임이 개봉했다. 돌이켜보니 그 시간동안은 캡틴 아메리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together, 통합의 시대였던 것 같은데(혹은 그게 먹히는 시대였던 것일수도) 앤드게임으로 다 조져진 지금은, 묘하게도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조차 분열이 거듭되고 있다. 앤드게임은 세계관을 다 조져버렸지만, 사실 조져진 건 단순히 영화뿐이 아니다. 역병이 세계를 다 조진 것인가. 이제는 다 서로 각자의 세계에서 서로 치고 박으며 온 세상이 불타오른다. 이런 헛생각을 하며 영화관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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