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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책상 앞에

[서평] 운명과 분노 (Fates and Furie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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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임

- 문학동네 북클럽 5월의 책, 운명과 분노. 60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이 어마무시해서 참여할까말까 고민하다가 언제 또 이렇게 읽어보겠나 싶고, 오바마가 강추했다고 하니 혹하는 마음에 도전했다.

- 다 읽고 난 감상은.... 사실 읽고 있는 중에도 굉장히 애매하게 느꼈던 게 재미있다고 하기엔 2% 부족한 것 같고, 재미없다고 하기엔 꼭 그렇지는 않은 뭔가 그 어중간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어땠냐구요? 라고 물으신다면... 아니 그러니까 말이에요... 이게.... 애매한데....

- 원제인 ‘Fates and Furies’는 ‘운명의 세 여신과 분노의 세 여신’을 말한다고 한다. 운명의 세 자매 ‘모에라이’는 클로토가 운명의 실을 뽑고, 라케시스는 운명의 실을 감거나 짜고, 아트로포스는 운명의 실을 가위로 잘라 삶을 거두는 역할을 담당한다. 태어나고 자라 삶을 살아가고 죽은 로토의 이야기가 ‘Fates’이다. 분노의 여신들 에리니에스는 알렉토, 티시포네, 메가이라를 가리키며, 이들은 정의와 복수를 담당한다. 마치 살아오는 내내 마음 속에 가득한 ‘화’를 담아왔을 것만 같은 마틸드의 이야기가 ‘Furies’ 이다.

- 이 작품은 연극 각본가로 성공한 남자 '로토'의 이야기인 '운명(Fate)'과 미스테리한 그의 아내 '마틸드'의 이야기 '분노(Fury)'로 구성되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운명'은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로토라는 캐릭터는 작품에서는 만인의 사랑을 받는 매력적인 남자라지만, 내 눈에는 그저 어리숙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그리고 심지어 2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끝에 알게된 아내의 ex-보이프렌드에 대한 질투라는 찌질함까지 더해져 정말 밑바닥 치는 캐릭터라고나 할까. 특히 죽기 한달 전, 친구인 콜리의 계략으로 마틸드에게 남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특히나 자신이 마틸드에게 첫 경험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에 분개하며 아내를 멀리하고 방황하는 모습은 정말 찌질의 최고치를 보여주는 거였다. 마틸드가 만났던 다른 남자와의 시간보다 자신이 부부로서 함께한 세월이 훨씬 길고 깊은데도 그렇게나 찌질하다니. '운명'의 마지막, 20여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질투와 분노로 범벅된 방향 모를 방황을 보고 있자니 아내에 대한 고마움도 제대로 모르는 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의 감정을 이렇게나 길게 봐야하나 싶었다. 그 부분이 제일 페이지가 안 넘어가서 읽기가 힘들었다.

'분노'편에 로토를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문구가 있다. 그래, 이거지.

분노 p.521~523

(중략) “오, 그러지 말아요. 내 남편이 아픈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군요.” 마틸드가 말했다.
“아프죠. 그레이트 아메리칸 아티스티티스Artistitis.” 피비 델마가 말했다. “늘 더 커지고, 더 요란해지고. 헤게모니의 가장 높은 지점에 올라가려고 떠밀고 다투고. 이 나라에서 남자들이 예술을 하겠다고 덤빌 때 걸리는 일종의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말해봐요, 로토는 왜 전쟁에 대한 희곡을 썼죠? 전쟁에 대한 연극이 감정에 대한 연극보다 늘 더 큰 성공을 거두기 때문이에요. 규모는 더 작더라도 소박한 작품이 글도 더 좋고 더 세련되고 더 재미있어요. 전쟁 이야기를 쓰면 상을 타죠. 하지만 댁의 남편의 목소리는 가장 조용하고 분명하게 말할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해요.”


- 한 사람의 태어나고 죽기까지의 삶을 시간순으로 그려냈던 ‘운명’과 달리 ‘분노’는 들쭉날쭉이다. 마치 남편을 잃고 난 후 감정의 밑바닥에서 소용돌이치고 방황하는 마틸드가 문득 문득 과거의 한 단편을 무작위적으로 떠올리는 듯 하다. 어떤 순간은 그녀가 대학에 가기 위해 비즈니스로 만났던 남자, 에어리얼과의 시간을 떠올렸고, 또 어떤 순간은 로토가 첫 눈에 반해 자신에게 청혼하던 바로 그 찰나였고, 또 어떤 때는 배우로서의 길이 풀리지 않던 로토가 마침내 첫 연극 각본을 써내던 그 날의 그 새벽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삶의 시작일 수도 있었던 어린 동생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까지. 그녀의 삶은 오렐리의 과거와 마틸드의 과거와 마틸드의 현재가 뒤섞여 혼재하였으며, 결코 친절하지 않았던 세상과 고단했던 그녀의 삶에 분노가 녹여져 있다. 어찌보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행동들을 선택했던 그녀였지만, 그녀가 특별해서 그랬던 건 아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또 한 사람의 마틸드일 수 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삶의 선택의 갈림길에서 가장 최선의 방법을 선택했던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또 한 명의 마틸드이다. 그레이트 아메리칸 아티스티티스따위인 로토보다 훨씬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지닌채 살아왔을 마틸드의 이야기가 더욱 와닿을 수 밖에 없던 이유.

- 로토는 꽤나 단순한 인생을 살아왔고(유년기의 질풍노도의 시기도 그냥 으레 지나가는 삶의 한 때라고 친다면), 마틸드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고(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한다면서 그녀의 과거 남자에 대해 알게 되었을때 질투로 정신이 나갔던 건 우습지만), 마틸드는 그저 그들 사이의 불필요하다고 판단되었던 이야기들은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은 것이지만, 결혼생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분명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그녀는 제대로 된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부부란 어떤 이들의 세계인지 배워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정을 이룬다는 것에 대해 너무나 서툴렀다.

그래서 고민이 되는 것이다. 부부 사이에 있어서 ‘앎’이 우선일까, ‘침묵’이 더 나은 선택일까. 그래도 침묵으로 인한 오해보다는 서로에 대해 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더 나은 선택이지 않을까 마음이 조금 기울기는 하지만, 사실 함부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 그나마 ‘분노’편을 통해 아쉬운 점을 잡아내고, 겨우겨우 책을 다 읽어낼 수 있었지만, 난 오히려 ‘운명’보다 ‘분노’에서 번역의 어색함을 몇몇 군데에서 느꼈고,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었다는 시원함을 느끼지만, 완독의 짜릿함은 느끼지 못했다. 그냥 작품이 나랑 안 맞았다는 것을 장황하게 말한 것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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